
비합리성의 시대, 합리적 개인의 길
서론: 합리적 비합리성의 역설
현대 경제학은 오랫동안 인간을 ’ 합리적 경제인(homo economicus)’으로 가정해 왔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의 등장으로 우리는 인간의 선택과 의사결정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명확히 볼 수 있게 되었다. 희소성 편향, 손실회피 성향, 앵커링 효과, 프레이밍 효과 등 다양한 인지적 편향들이 우리의 판단을 좌우한다. 역설적이게도 대다수의 소비자가 비합리적 선택을 한다면, 그것이 새로운 ‘합리성’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만약 다수의 비합리적 선택이 시장의 표준이 된다면, 그것은 과연 정당한가?
본론: 상식밖의 경제학이 보여주는 세계
인센티브의 숨겨진 힘
스티븐 레빗과 스티븐 더프너의 『상식밖의 경제학』(Freakonomics)은 경제학적 사고를 통해 일상의 현상을 새롭게 해석한다. 이 책의 핵심은 단순하다: “인센티브가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 사람들은 주어진 인센티브에 반응하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행동한다.
부동산 중개인의 사례를 보자. 이들은 고객의 집을 최대한 높은 가격에 팔아야 할 동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빠른 거래 성사가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집을 팔 때는 평균 10일 더 오래 시장에 내놓고 10% 더 높은 가격에 판매한다. 이처럼 인센티브 구조는 표면적 목표와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를 만든다.
더 충격적인 사례는 범죄율과 낙태 합법화의 관계다. 레빗은 1990년대 미국의 범죄율 감소가 경찰력 강화나 경제 호황보다 1970년대 낙태 합법화와 더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원치 않은 환경에서 태어날 뻔한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20년 후 범죄율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이 논쟁적 주장은 우리가 도덕적 직관이나 관습적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회 현상을 분석해야 함을 시사한다.
숨겨진 인과관계와 상관관계의 함정
『상식밖의 경제학』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본의 스모 선수들 중 승부 조작이 있었다는 증거를 통계적으로 밝혀낸 사례나, 학교 교사들의 시험지 부정행위를 데이터로 포착한 연구는 숨겨진 패턴을 발견하는 경제학적 사고의 힘을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법은 행동경제학과 접점을 이룬다. 다닐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의 연구가 보여주듯, 인간의 의사결정은 합리적 계산보다 휴리스틱(의사결정 지름길)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소비자도, 정책 입안자도, 마케터도 모두 이러한 비합리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편향된 정보와 권력의 비대칭성
행동경제학의 통찰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활용해 소비자의 선택을 교묘히 조작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기업들은 ‘제한된 수량’, ‘마지막 기회’, ‘베스트셀러’ 같은 문구로 소비자의 인지적 편향을 자극한다. 정부 역시 ‘국민의 이익’이라는 명목 하에 특정 정책에 대한 지지를 유도하기 위해 프레이밍 효과를 활용한다.
문제는 합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간극이다. 소비자의 비합리적 편향을 이용한 마케팅 전략이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정당한 것은 아니다. 기업과 정부가 가진 정보와 권력의 우위는 정보 비대칭을 심화시키고,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선택을 제한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가속화된 조작
디지털 기술과 빅데이터의 발전은 이러한 비대칭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온라인 행동을 분석하여 가장 취약한 순간에 가장 효과적인 설득 기법을 적용할 수 있다. 『상식밖의 경제학』에서 분석한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의 인종 편향처럼, 디지털 환경에서도 우리의 선택은 알게 모르게 특정 방향으로 유도된다. 맞춤형 광고와 추천 시스템은 표면적으로는 편의를 제공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선택 가능성을 특정 방향으로 좁히는 역할을 한다.
개인의 실천: 시스템 속 주체성 찾기
비합리적 선택이 만연한 세계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단순히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개인적 차원의 실천
1. 경제학적 사고 훈련하기: 『상식밖의 경제학』이 보여주듯, 표면적 현상 너머의 인센티브 구조와 숨겨진 동기를 파악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 정책/상품/서비스가 누구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가? “라는 질문을 습관화하자.
2. 의도적 불편함 선택하기: 모든 편리함을 거부할 수는 없어도, 때로는 의식적으로 불편한 선택을 함으로써 자동화된 반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충동구매를 자제하기 위한 ‘24시간 룰’을 적용하거나, 소셜미디어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등의 작은 실천이 가능하다.
3. 정보 소비 다양화: 자신이 동의하는 의견만 들으면 확증 편향이 강화된다. 의도적으로 다양한 관점의 정보를 접함으로써 인지적 유연성을 키울 수 있다.
4. 일상적 질문 습관화: “이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가?”, “누가 이 정보를 통해 이익을 얻는가?” 같은 질문을 습관화하면 비판적 사고력을 유지할 수 있다.
공동체적 접근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소비자 협동조합, 지역 공동체 경제, 윤리적 소비 운동 등 집단적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과의 연대는 개인의 작은 실천을 더 큰 변화로 확장시킬 수 있다.
결론: 비합리성을 인정하는 합리성
스토아 철학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한다. 시장과 정부의 거대한 시스템을 당장 바꿀 수는 없지만, 자신의 판단과 행동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상식밖의 경제학』의 저자들은 “도덕적 관점이 아닌 도덕적 중립성을 가지고 세상을 관찰하라”라고 조언한다. 이처럼 진정한 합리성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비합리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완벽한 이성적 판단은 불가능하더라도, 자신의 편향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응하려는 노력은 가능하다.
비합리적 선택이 만연한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접근은 그 비합리성을 직시하고, 작은 영역에서부터 의식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시스템의 모순을 인식하고 작은 저항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시스템의 단순한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비합리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합리적 개인’의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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