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콜하제의 단편소설 '언어의 발명(Erfindung Einer Sprache)'
언어의 발명과 생존의 지혜: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에 담긴 역사와 의미
2021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10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단순한 전쟁 영화를 넘어 언어와 정체성, 그리고 인간의 생존 본능을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독일 작가 볼프강 콜하제의 단편소설 '언어의 발명(Erfindung Einer Sprache)'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나치 강제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지적 게임을 통해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생존의 지혜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질(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은 나치에게 체포되어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된다. 그러나 우연히 손에 넣은 페르시아어 책을 이용해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고 속임으로써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독일군 코흐 대위(라르스 아이딩어)는 전쟁 후 테헤란에서 식당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페르시아인' 질에게 언어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우크라이나 출신 감독 바딤 피얼먼은 이 영화에 대해 "전쟁 중에 위트와 재치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가 많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엮어서 만든 일종의 모음집"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 중에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례가 적지 않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그 중에서도 언어를 무기로 삼아 생존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재구성했다.
언어의 발명: 죽음의 공간에서 피어난 지적 창조
영화의 핵심은 질이 페르시아어를 전혀 모르면서도 하루에 4개씩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그가 발견한 해결책은 놀랍도록 영리하다. 수용소에 들어오는 유대인 명부에서 이름들의 일부를 따와 새로운 '페르시아어' 단어를 창조해낸 것이다.
"나"는 자신의 이름 '질(Gilles)'에서 따서 '일(il)'로, "너"는 대위의 성 '클라우스(Klaus)'에서 따서 '아우(au)'로 명명한다. 수용소 내 질을 괴롭히는 병사 '막스(Max)'의 이름에서는 '죽음'을 의미하는 '악스(ax)'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사람의 이름과 그 사람이 풍기는 이미지, 성격을 연관시켜 가짜 페르시아어 어휘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은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실제로 영화제작팀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프랑스인 희생자들의 이름을 바탕으로 극중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영화적 장치를 넘어 희생자들을 기리는 의미 깊은 추모의 방식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기억, 사라진 이름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강렬한 감동을 준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에 붙잡힌 질은 수용소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지 묻는 조사관 앞에서 자신이 '페르시아어' 단어를 만들기 위해 외웠던 2,840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뇌인다.
수용소 문서는 모두 불태워졌고, 그곳에서 죽은 이들의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지만, 오직 질의 기억 속에만 그들의 이름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역설적으로 질의 거짓말이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름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탁월한 연기와 영화적 완성도
두 주연 배우의 연기는 영화의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아르헨티나 출신 배우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는 모국어가 스페인어임에도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며 질/레자의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그는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120BPM>에서 주연을 맡아 주목받은 바 있다.
독일 국민배우 라르스 아이딩어는 냉혈한 나치 장교에서 점차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코흐 대위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바딤 피얼먼 감독은 "코흐와 질을 연기하는 다른 배우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두 배우의 호흡은 탁월했다.
또한 미장센 측면에서도 제한된 수용소의 폐쇄적이고 어두운 공간과 수용소 밖 자연의 넓고 자유로운 풍경의 대비는 영화적 긴장감을 더한다.
언어, 정체성, 그리고 인간성
<페르시아어 수업>은 단순한 생존 이야기를 넘어 언어와 정체성에 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질이 대위 앞에서 암송한 가짜 페르시아어 시(추측컨대 히브리어 시)는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당신은 태양이 천천히 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하지만 갑자기 어둠이 내리자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영화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지적 창조력과 생존 의지가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 그리고 언어가 어떻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때로는 구원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전쟁의 광기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적 유대와 신뢰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이 영화제에서 10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것은 단지 예술적 완성도 때문만이 아니다. 역사의 어두운 시기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조명하고, 잊혀질 뻔한 희생자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영화의 윤리적 태도가 관객들의 마음을 깊이 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닌, 역사와 언어,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깊은 성찰을 담은 명작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